
참고: 오희숙, 「AI 창작음악에 나타난 음악적 포스트휴머니즘의 미학」 (『음악에서의 AI와 포스트휴머니즘 미학』, 오희숙 외 5명, 모노폴리, 2022)
작곡가는 일반적으로 내면의 표현 욕구를 음악으로 옮기는 사람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창작자로서 나는 종종 그 신화적 믿음이 현실과 부딪히는 지점에서 혼란을 느끼곤 했다. 그것은 전통적인 음악관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대의 음악적 현상들 사이의 괴리감이었다. 이러한 의식 속에서 접한 오희숙 선생님의 글은 음악과 창작에 대한 동시대적 성찰을 통해, 과거의 감수성과 현재의 감수성 사이에 존재하던 그 시차를 극복할 실마리를 제공했다.
특히 이 글은 '현대음악'이라는 용어 자체에 대한 나의 질문에 어느 정도 답이 되었다. 스스로 '클래식(Classic) 음악' 전공자라 칭하는 내가 학교에서 '현대(Contemporary) 음악' 수업을 듣는 모순 속에서, 정작 그 '현대음악'들은 이미 박제된 과거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이처럼 과거만이 뒤섞인 채 모호하게 떠다니던 '현대음악'의 진정한 의미를 포스트휴머니즘 미학의 논의를 통해 재고해볼 수 있었다.
내가 다니는 음악대학에서 다루는 ‘현대음악’이란, 통상적으로 1920~1950년대 전후, 조성이라는 공통 관습이 해체되기 시작한 시점의 모더니즘 음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우리는 거의 백 년 전의 ‘현대(?)’에 머물러 있을까? 여기에는 체계를 유지하려는 학교의 관성이 한몫하고 있을 것이다. 20세기 음악에 대한 정확한 용어들의 활용이 시급해 보인다. ‘현대음악’은 진정 지금-여기의 흐름을 담아내는 음악을 논의하는 용어로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모방 미학에서 음악은 ‘이데아'를 재현하는 예술로 여겨졌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며 신으로부터 독립한 ‘인간’이 예술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재현의 대상은 외부 세계에서 인간의 내면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이때 음악은 칸트의 ‘천재론’에서 드러나듯, 한 개인의 내면적 주관성과 독창적인 영감을 표현하는 활동으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천재적 인간을 창작의 유일무이한 주체로 상정하는 휴머니즘 예술관은 수세기동안 미학의 근간을 이루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이러한 인간 중심적 사고는 세계대전을 겪으며 도전을 받게 되었고, 21세기 이후에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흐려지는 ‘포스트휴머니즘’적 사유가 등장했다. 오희숙 선생님이 지적하듯, 인간 고유의 영역이던 곳에 기계가 개입하면서 나타난 ‘AI 창작 음악’은 이러한 전환이 가시화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AI 창작 음악을 창의적이라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먼저 창의성의 척도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AI 음악은 방대한 양의 기존 음악 데이터를 학습하고 그 패턴을 모방하여 결과물을 내놓는다. 그러한 방식으로 음악을 생성하는 AI 모델 ‘에미(Emmy)’가 만든 음악은 “형편없는 모차르트 모방”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은 ‘독창성(originality)’을 예술의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전통적 시각에 근거한다. 하지만 에미를 만든 데이비드 코프는 이에 대해, ‘창의성(creativity)’이란 무(無)에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지만 서로 연결되지 않았던 재료들을 재합성하는 것”이라 말한다. 낭만주의 시대부터 이어진 ‘독창성’의 신화에서 벗어나, 기존 텍스트의 정교한 재배열과 재조합 과정에서 발현되는 ‘창의성’의 가치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일찍이 텍스트가 ‘인용들의 조직’이며 신적인 존재로서의 창작자는 죽었다고 선언한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 개념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처럼 현대 예술의 맥락에서 창의성을 이해한다면, AI 음악이 독창적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논리적으로 합당하지 않은 판단이라 할 수 있다.
AI의 창의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과연 AI에게 주체적 정체성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전통적으로 작곡가의 정체성이란 고유한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한 개인과 직결되었기에, 인간의 통제 아래 데이터를 재조합하는 AI는 독립된 주체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적 예술가상은 이미 해체되고 있다. 요하네스 크라이들러의 <외주(Fremdarbeit, https://www.youtube.com/watch?v=L72d_0zIT0c)>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인터넷에서 고용한 작곡가와 프로그래머에게 제작을 맡기고 자신은 단 하나의 음도 쓰지 않은 채 작품을 발표했으며, 심지어 여러 페스티벌에서 연주하며 많은 수익을 얻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전통적 예술관을 해체한 자리에 AI 음악은 어떤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는가? 어쩌면 창작의 중심을 ‘작곡가’에서 ‘청중’으로 옮기는 데서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AI 작곡 플랫폼 에이바(AIVA)의 CEO 피에르 바로가 ‘모든 사람이 자기만의 음악을 갖도록 한다’고 그 개발 목적을 밝혔듯, AI 기술은 소수의 작곡가가 다수의 청중을 위해 만들던 전통적 음악의 구도를 전복시킨다. 이는 음악사에서 작곡가와 청중 사이의 ‘영원한 불평등’을 지적한 크나이프의 논의와 연결된다. 그에 따르면 전통 미학은 작품 자체의 완결성만을 중시했을 뿐, 실제로 음악을 듣는 청중의 경험과 해석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했다. 하지만 AI는 개별 청취자의 요구에 맞는 음악을 실시간으로 생성하며, 청중을 수동적인 감상자에서 능동적인 사용자이자 창작의 참여자로 격상시킨다. 따라서 칸트의 ‘순수예술’ 개념 이후 그와 분리되어 있던 ‘실용음악(Gebrauchsmusik)’의 가치를 복원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AI 음악의 미학적 의의는 인간 작곡가를 흉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청중을 창작 과정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오희숙 선생님의 글을 통해 AI 창작 음악을 ‘포스트휴머니즘’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는 과정은 앞서 언급했던 전통적 창작관과 동시의 괴리, 그리고 박제된 과거에 머물러 있던 ‘현대음악’의 의미를 재정의하는 과정이 되었다. ‘독창성’에 갇혀 있던 창작가에 대한 척도는 ‘창의성’으로 확장되었고, ‘천재’라는 신화적 작곡가는 롤랑 바르트가 선언한 ‘저자의 죽음’처럼 그 권위를 내려놓게 되었으며, 작품 중심의 미학은 ‘청중’이라는 새로운 주체를 맞이하게 되었다. ‘현대음악’이란, 특정 시대의 양식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인간과 기술, 창작자와 감상자의 경계를 아우르며 기존 음악의 관습에 질문을 던지는 태도에 있다.